"성인용품의역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성인용품 위키
이동: 둘러보기, 검색
3번째 줄: 3번째 줄:
 
[[파일:Jy171102c2.jpg|섬네일|성인용품의 역사]]
 
[[파일:Jy171102c2.jpg|섬네일|성인용품의 역사]]
 
"인도의 후궁 제도는 고대 인더스 문명기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특히 굽타 왕조기에 그 화려함은 극치에 달했다. 후궁에는 규방녀들이 230명이나 시중을 들고 있었고, 국왕에게는 수백 명을 헤아렸다...바챠야나는, 왕은 애첩 모두에게 만족을 충족시켜줄 수 없기 때문에 동방의 후궁처럼, 시녀나 하녀들에게 남장을 시켜 나무뿌리나 열매 등으로 남자 성기 모양의 노리개를 만들어 그것으로 애첩들의 정욕을 진정시키라고 가르치고 있다."
 
"인도의 후궁 제도는 고대 인더스 문명기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특히 굽타 왕조기에 그 화려함은 극치에 달했다. 후궁에는 규방녀들이 230명이나 시중을 들고 있었고, 국왕에게는 수백 명을 헤아렸다...바챠야나는, 왕은 애첩 모두에게 만족을 충족시켜줄 수 없기 때문에 동방의 후궁처럼, 시녀나 하녀들에게 남장을 시켜 나무뿌리나 열매 등으로 남자 성기 모양의 노리개를 만들어 그것으로 애첩들의 정욕을 진정시키라고 가르치고 있다."
 +
 +
딜도는 기원전 3세기경 고대 그리스부터 이미 널리 알려진 발명품 중 하나였다. 오리보스로 불렸고, 가죽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미개사회에서도 초로 만든 원시적 형태의 딜도가 발견되기도 한다. 사실상 인류 역사와 함께 해온 도구인 셈이다. 이 도구는 물론 개개인의 사적인 즐거움을 위해서도 쓰였겠지만, 기록에 의하면 고대 왕실의 후궁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로도 쓰였다고 한다. 아무리 왕이라도 수백 명이나 되는 여성을 거느리며 모두를 만족시켜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인도의 굽타 왕조는 책을 통해 왕을 대신해 후궁들을 만족시켜줄 만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하녀나 시녀를 남장시킨 후, '나무뿌리나 열매 등으로 만든 남자 성기 모양의 노리개'를 그들에게 들려 후궁에게 왕 대신 보내는 방법이 그것이다. ‘카마수트라’가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
 +
2. 브라게이트(고환보호대)
 +
 +
"...훅스가 기술하고 있듯이, 15세기 초까지 남자들은 짧은 상의만 입고 있어 짐승의 모습과 다름없었고, 과다하게 몸이 노출되어 품위가 없었다. 게다가 처녀와 부인들이 시종 장난을 쳐서 풍기가 문란하다는 교회의 엄한 하달로, 고환을 포장하는 가랑이 주머니, 즉 성기 보호대가 고안되었다."(책 '섹슈얼리티 성 문화사', 후쿠다 카즈히코 저)
 +
 +
유럽의 중세 시절 남자들의 의상은 지금의 옷보단 '곰돌이 푸'의 그것에 더 가까웠던 모양이다. 이를 보다 못한 교회의 엄한 명령에 의해 고환을 감싸는 가랑이 주머니, 즉 성기 보호대가 개발되었다. 그런데 이게 남자들 사이에 널리 퍼지면서, 또 다른 패션이 되기 시작했다. 그 곳을 감싸는 고급 천이 팔리고, 금이나 은으로 자수를 놓은 '프리미엄 상품'들이 출시되었다. 심지어 페르시아 진주를 박은 왕관 같은 명품까지 있었다고 하니, 한계가 분명한 내용물을 포장지로 커버해보려는 심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던 것 같다. 재미있는 사실은, 겉을 예쁘게 장식하는 걸 넘어 주머니 안에 레몬이나, 두꺼운 헝겊조각을 뭉쳐 넣어 크기를 위장하는 남자들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개중엔 암소 머리만한 고환보호대까지 개발되었다고 하니, 어떻게 보면 브라게이트(고환 보호대)야말로 당시 남성들이 자신들의 매력을 어필했던 진짜 '사랑의 발명품'이었는지도 모르겠다.

2019년 2월 26일 (화) 12:40 판

235DC0425835432339.png

성인용품의 역사 시작

성인용품의 역사

"인도의 후궁 제도는 고대 인더스 문명기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특히 굽타 왕조기에 그 화려함은 극치에 달했다. 후궁에는 규방녀들이 230명이나 시중을 들고 있었고, 국왕에게는 수백 명을 헤아렸다...바챠야나는, 왕은 애첩 모두에게 만족을 충족시켜줄 수 없기 때문에 동방의 후궁처럼, 시녀나 하녀들에게 남장을 시켜 나무뿌리나 열매 등으로 남자 성기 모양의 노리개를 만들어 그것으로 애첩들의 정욕을 진정시키라고 가르치고 있다."

딜도는 기원전 3세기경 고대 그리스부터 이미 널리 알려진 발명품 중 하나였다. 오리보스로 불렸고, 가죽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미개사회에서도 초로 만든 원시적 형태의 딜도가 발견되기도 한다. 사실상 인류 역사와 함께 해온 도구인 셈이다. 이 도구는 물론 개개인의 사적인 즐거움을 위해서도 쓰였겠지만, 기록에 의하면 고대 왕실의 후궁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로도 쓰였다고 한다. 아무리 왕이라도 수백 명이나 되는 여성을 거느리며 모두를 만족시켜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인도의 굽타 왕조는 책을 통해 왕을 대신해 후궁들을 만족시켜줄 만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하녀나 시녀를 남장시킨 후, '나무뿌리나 열매 등으로 만든 남자 성기 모양의 노리개'를 그들에게 들려 후궁에게 왕 대신 보내는 방법이 그것이다. ‘카마수트라’가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2. 브라게이트(고환보호대)

"...훅스가 기술하고 있듯이, 15세기 초까지 남자들은 짧은 상의만 입고 있어 짐승의 모습과 다름없었고, 과다하게 몸이 노출되어 품위가 없었다. 게다가 처녀와 부인들이 시종 장난을 쳐서 풍기가 문란하다는 교회의 엄한 하달로, 고환을 포장하는 가랑이 주머니, 즉 성기 보호대가 고안되었다."(책 '섹슈얼리티 성 문화사', 후쿠다 카즈히코 저)

유럽의 중세 시절 남자들의 의상은 지금의 옷보단 '곰돌이 푸'의 그것에 더 가까웠던 모양이다. 이를 보다 못한 교회의 엄한 명령에 의해 고환을 감싸는 가랑이 주머니, 즉 성기 보호대가 개발되었다. 그런데 이게 남자들 사이에 널리 퍼지면서, 또 다른 패션이 되기 시작했다. 그 곳을 감싸는 고급 천이 팔리고, 금이나 은으로 자수를 놓은 '프리미엄 상품'들이 출시되었다. 심지어 페르시아 진주를 박은 왕관 같은 명품까지 있었다고 하니, 한계가 분명한 내용물을 포장지로 커버해보려는 심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던 것 같다. 재미있는 사실은, 겉을 예쁘게 장식하는 걸 넘어 주머니 안에 레몬이나, 두꺼운 헝겊조각을 뭉쳐 넣어 크기를 위장하는 남자들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개중엔 암소 머리만한 고환보호대까지 개발되었다고 하니, 어떻게 보면 브라게이트(고환 보호대)야말로 당시 남성들이 자신들의 매력을 어필했던 진짜 '사랑의 발명품'이었는지도 모르겠다.